banner
  1. About
  2. Blog
  3. Contact
독서 · 

이미지 출처: Patrick Perkins on Unsplash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인정 투쟁 차원에서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내 관점에서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발상일 뿐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실제로 물질적인 차원에서 성립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도 자선가가 아니라면 당신에게 대가를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 대가는 사실 무엇이든지 상관 없다. 돈일 수도 있고, 당신이 가진 다른 재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떨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대신 해 달라고 할 것이다. 즉 일을 해 달라고 할 것이다.


이건 얼핏 자유로운 거래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일을 해 달라는 요구를 부당하게 느낀다면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그 물품을 당신 스스로 구할 수 없다면 어떨까. 당신에게 그 거래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게 될 것이다. <대부>의 대사처럼 그것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된다. 당신은 그를 위해 그가 원하는 일을 해줄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제도의 핵심은 그래서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다.


만약 당신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을 일부 사람들만이 소유한다고 하자. 그리고 당신에게 그러한 생산 수단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구조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 두 조건이 성립하는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이 영속적인 예속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살아가기 위해서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부분은 바로 생산 수단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구조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시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당신이 생산 수단을 얻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에게 상응하는 재화를 주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공장 노동자들은 구조적으로 그만한 재화를 축적할 수 없었다. 생산 수단인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킨 대가로 제공했던 돈은 딱 생필품을 살 만큼의 양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잉여 이익은 자본가에게 돌아갔다. 잉여 이익은 자본가의 배를 불리기도 했지만 그가 소유한 생산 수단의 진보에도 투자되었다. 결국 이러한 투자는 다시 생산 수단을 얻을 수 있는 진입 장벽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을 영속적인 예속 상태에 빠뜨리는 두 조건이 항상 완벽하게 성립하지는 않는다.


첫째로, 사람들은 자본가들이 생산한 물품을 구매하지 않을 수 있다. 자본가들이 생산한 물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헤겔이 노예의 자의식이 존재하지 않으면 주인의 자의식도 성립될 수 없으므로 관계의 주도권이 오히려 노예에게 있다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세자르 리츠가 말하듯이 "고객은 왕이다".


생산물을 구매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늘날 생산되는 물품 중 대부분이 보드리야르가 <사물의 체계>에서 지적하듯이 생필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구매 억제력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비교 심리와 계급 의식에 의해서 다소 반감된다. 단순히 살아가는 데에는 아반떼로 충분하지만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벤츠와 제네시스를 보며 당신은 종종 치명적인 불안과 공항마저 느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구매해야 하는 물품이 생필품일지라도 오늘날 소비자들에게는 다른 기업에서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댓글 0

독서 카테고리 다른 글